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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불순세력과 폭도들의 불법시위라며 시민들

의 피해 사실을 숨기는 일방적인 왜곡보도가 난무

했습니다.

김 추기경이 광주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당시 광

주대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를 통해서였습니다.

1980년 5월 19일 윤 대주교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사

무실에서 계엄군에 의해 시민들이 무차별 폭력을 당

하는모습을목격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이날 오후 서울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서김추기경을만나당시상황을전했습니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 김 추기경은 5월 20일 전

두환 당시 보안 사령관을 찾아가서 ‘유혈사태를 중지

해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했습

니다. 김 추기경은 이후에도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

에게접촉을시도했지만연결은되지못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주교회의 이후 광주로 돌아간 윤 대주

교에게 “부상자가 많다는 소식에 걱정이 크다. 무력진

압을 막아보려 노력하겠다.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한

다”라며 10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도 동봉하여 비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돈은 부상자들을 긴급 구호하는

데 써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광주는 고립된 상태

였기에 편지는 계엄사령부와 광주 상무대 군종신부를

통해극비리에윤공희대주교에게전달되었습니다.

김 추기경의 이러한 의지는 광주대교구에도 전해져

1980년 5월 23일 ‘광주사태에 대한 전국 신자들에게

기도 요청’,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광주에서 벌어진 상

황들을 소상히 알린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등이 작성

돼 퍼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

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비극적인 상황을 피할

수없었습니다.

당시에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언급과 함께 기도

를 요청한 메시지의 발표는 서울주보였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SNS같은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

태에서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매

체가서울주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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