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7. 유신시대 명동대성당에서의 민주화운동




1. 머리말


명동대성당이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명동대성당은 1970년대 이후 “시대의 요구와 아픔, 민중의 눈물을 품어 이 땅에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모태(母胎)와도 같은 곳”이며 “격랑의 현대사 속에서 불의와 폭력, 인권 침해 등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하는 악에 예언자적 소명의식을 갖고 당당히 맞섰음”에 대해 국민들은 묵시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이젠 언론에서도 명동대성당을 ‘민주화의 성지(聖地)’라고 부른다. “한국 사회의 고뇌와 눈물이 밴 정의의 보루”로 일관하던 명동대성당이 앞으로도 그 역할과 소명의식에 변함이 없기를 정치와 사회환경이 크게 변한 지금에도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그것은 곧 다가올 2000년 대희년의 정신을 실제로 한국 사회에 구현해 가는 핵심적 역할을 명동대성당이 해주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 연구는 시기적으로는 유신시대(1972년-1979년),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명동대성당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시기에 벌어졌던 명동대성당에서의 민주화운동, 그 역할과 소명의식, 그리고 그러한 역사가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주는 교훈을 되새겨 보려는 취지를 지닌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명동대성당이 가장 깊숙히 개입된 사례들 중에서 3개 사례, 즉 1974년의 ‘지학순 주교 사건’과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 1976년의 ‘명동 3․1사건’,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개입의 와중에서 교회의 또 다른 편에서 교회의 정의구현활동에 대한 견제 움직임으로서 대두되었던 교회 내의 신학적․이념적 갈등 및 세칭 ‘구국사제단’의 결성 움직임만을 간략히 다루려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향해 유신시대의 명동대성당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이 글을 맺으려 한다.

2. 교회의 정치적 개입, 예언자적 역할 : 교회 - 국가 갈등과 교회 내 갈등


1960년대 말 이래 두드러진 제3세계 천주교회들의 사회․정치적 개입이라는 전례없는 변화는 통상 다음의 두 가지, 즉 대외적인 요인으로서 해방신학을 포함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가르침들의 영향 및 대내적인 요인으로서 각국에서의 억압적인 권위주의적 지배에 대한 교회의 내적 반응으로 설명되며, 한국의 경우, 교회의 정치적 개입이 활발했던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말까지)는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과 더불어 권위주의적 폭압성이 공존했던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경우에 천주교회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은 권위주의정권이 교회의 구성원의 인신(人身)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우 1974년 7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지학순 주교 사건)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prophetic role)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박해를 무릅쓰면서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선포(annunciation)와 규탄(denunciation)을 행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향 제시와 사회 비판의 기능은 통상 잘못된 기존질서를 겨냥하게 되므로 종종 정치적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교회 특유의 그러한 예언자적 역할이 정치적 반대(political opposition)로서 구체화되기 때문에 교회 - 국가 갈등 (Church-state conflicts)이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갈등은 특히 제3세계 군부권위주의 정권들의 전형적인 정치적 도그마들이었던 국가안보․반공․경제발전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 및 비민주성에 대한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사회․정치적 개입은 정교분리교의(the doctrine of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간의 구원이나 인권에 관계되는 경우 교회가 정치질서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Gaudium et Spes;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no. 76). 다만, 성직자가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거나 정당 및 노동조합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여 전문적 정치인이 되는 것을 금하고 있을 뿐이다.(교회법 285조, 287조)

3. 주요 사례들


1) 1960년대와 한국 가톨릭교회

박정희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으로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어 사회․경제적 구조 및 국민의 생활과 가치관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이 수반한 심각한 부작용은 연간 국민총생산 성장률 15.9%라는 최고점에 달했던 1969년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농촌사회의 피폐, 가속되는 이농현상과 도시빈민의 증가, 빈부의 격차 심화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증가일로의 외채와 외세 의존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부정부패 등등이 그것이었다. 이 시기에 벌어진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1964년 6․3사태), 평화시장 재단공 전태일의 분신(1970. 11), 광주 대단지 봉기(1971. 8), 그리고 유신체제(1972-79)에 대한 반대 및 수립 등이었다.
이 시기의 명동대성당은 어떠했는가. 명동대성당은 1962년 6월 29일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본당이 되었고, 1968년 5월 29일엔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했고, 1969년 4월 30일에 그는 최연소인 47세로의 나이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는 국제적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고,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김수환 추기경이 견지한 진보적이고 초교파적인 입장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 및 평신도 지도자들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신하도록 격려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정신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으며, 여타 민주화세력들도 도덕적 권위를 지닌 가톨릭교회에게서 준거점을 찾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교회의 투신을 격려하는 징표가 되었다. 비록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교회에 미치게 되어 교회의 사회․정치적 공간에의 참여를 설명해 줄 신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말부터 한국의 교회 - 국가관계는 점차 갈등관계에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966년 5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교회 전체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수용하도록 독려하는 사목교서를 발표했고, 또한 주교들은 ‘우리의 사회신조’라는 제목의 1967년 6월의 사목교서에서 증가일로의 사회․경제적 문제점들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어 1968년 1월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으로 교회는 주교들과 가톨릭노동청년회(J.O.C. : 지오쎄)를 통해 처음으로 사회․정치적 상황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함이 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어 교회 - 국가 갈등과 교회의 사회․정치적 참여는 1970년대 초에 들어와서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1971년 10월 5일, 1,500 명 이상의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이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교구사제들이 집전하는 원주교구의 미사에 참레한 후 거리로 나가 ‘부정부패추방 궐기대회’를 한 것이 하나의 신호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명서들과 활동들은 교회 전체는 물론, 교회의 방관과 침묵을 늘상 당연시했던 정치지도자들 및 사회 대중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1972년 10월에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었고, 2년 후인 1974년에는 명동대성당이 농성대의 ‘소도’(蘇塗)이자 민주화운동의 성역으로 자리잡게 된 첫 계기로서 ‘지학순 주교 사건’이 벌어진다.

2) 유신시기의 주요 사례들

가톨릭교회와 국가와의 사이의 갈등은 1974년부터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주교 사건’과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이 있었던 시점이었다. 그 이후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 안팎에서 벌어진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중요한 촉매 역할을 수행했고,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명동대성당이 주축이 되어 벌였던 민주화․인권운동은 무척 다양한 쟝르에 걸쳐 벌어졌다. 지학순 주교 사건을 계기로 한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한 노동운동, 1979년의 ‘오원춘 사건’을 비롯한 농민운동, 1978년의 ‘7․6 사건’(전주교구 신부들 몇 명이 당국에 의해 삼엄하게 감시당하고 구타당했음)을 비롯한 교권수호활동,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결성과 1976년의 ‘명동 3․1 사건’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언론자유화운동, 정부의 반공주의 캠페인이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는 것을 비판하고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정권 정당화 및 연장의 미끼로 삼았던 유신체제를 반국가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비판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여러 차례에 걸친 입장 표명, 김지하를 비롯한 양심수들을 옹호하는 인권운동, 그리고, 정부가 집행했던 의심쩍은 사례들에 대해 조사 및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 고문 사건, 양심선언을 남기고 자살한 서울 농대생 김상진을 위한 추모미사,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에 대한 구명운동 등이 중요했다고 보겠으며, 이 사건들은 특히 명동대성당 안에서 울려 퍼짐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될 수 있었다.
  • (1) 지학순 주교 사건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된 것은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특히 주교에게, 직접 가해진 위해(危害)였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으로 약칭) 소속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후, 지학순 주교는 그를 찾아 온 김수환 추기경에게 민청학련이 공산주의 단체가 아니며 그 학생들에게 (김지하를 통해) 전해준 돈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기금이었고, 자신의 행위는 분명코 용공행위가 아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가석방 중이던 7월 23일,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여 유신체제를 국민의 불가양도한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품위를 짓밟는 가장 참혹한 기본권 유린이라고 비판하였고 그 날로 다시 체포되었다.
    지학순 주교가 체포된 후, 교회는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모임,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의 「지학순 주교에 관하여」라는 성명서 발표(7. 10), 「지주교 사건에 대한 해명서」(8. 6) 등을 내면서 대응하였으나, 어느 경우에서도 이 사건을 다룰 구체적인 방향이 제시되지 못했고, 국가의 압력에 대항해 나아갈 보다 적극적인 주체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라는 명칭하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사제들의 단체가 조직되어, 9월 26일 명동대성당에서는 대략 2,000명의 사제와 신자들이 참석하여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제1시국선언’을 냈고, 약 2,000명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때의 시위는 약 20명의 외국인 사제들을 포함한 사제들이 참여한 최초의 가두 데모였고, 그 시위 및 시국선언발표는 사제단이 공식적으로 정치적 반대 운동(political opposition movement)을 시작했음을 뜻하며, 한국교회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의 의의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자.
    첫째, 이 때부터 교회와 국가, 즉 한국 가톨릭교회와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은 본격적인 갈등관계로 치닫게 되었고, 교회의 제도적 대웅 방안으로서 결성된 정의구현사제단은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개입을 선도했다. 그리고 지주교의 ‘양심선언’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제1차 시국선언’은 교회의 예언자적 - 사목적 소명을 처음으로 천명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둘째, 교회는 정치적 탄압에 대한 규범적 방어망의 역할을 한다. 만약 정치적 탄압이 교회에 도움을 청한 이들에게 또는 거기에 연루된 성직자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면 정부는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훼손시키게 되며, 반면에 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옹호하는 정치적 반대 운동 세력들에게는 역으로 정당성 내지 신뢰감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신체제 하에서의 반정부운동에의 교회의 개입은 그런 반대운동을 ‘용공’으로 규정한 정부의 비난을 중립화시켰다.
    셋째, 이 사건은 교회를 각성시켰다. 한 좋은 예가 1974년 10월 9일 서울 가톨릭대학(신학부)에서 열린 전국성년대회(the National Holy Year)이었다. 전주교구의 김재덕 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회교리에 입각해 신자들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에 관해 강론을 한 후 대회 끝부분에는 사제단의 주도하에 사제와 수녀들을 포함한 약 5,000명의 참가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지주교를 석방하라!” “헌정질서 회복하라!” “민심은 천심이다!” “민중의 소리를 들어라!” 등의 구호를 담은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경찰과 대치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는데, 최초로 주교들이 정치적 시위에 가담했다는 의의도 지닌다.
    넷째, 지학순 주교의 석방 및 인권회복을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가 공동으로 대규모 집회와 시위 등을 벌임에 따라 신․구교 지도자들 및 신도들 사이에 연대(solidarity)가 형성되어 갔고, 그런 가운데 1974년 12월 25일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는 등, 신․구교의 공동보조는 그 이후 자주 보여졌다.
    끝으로, 지학순 주교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정의평화위원회는 세계 각국의 교회들 앞으로 호소문을 냈으며, 교황청은 7월 6일과 13일 바티칸 방송을 통해 지주교 사건을 경악스럽고 슬픈 사건으로 전 세계에 소개했다. 이렇듯 교회는 국제적인 연결망과 가시도(可視度)를 지니고 있기에 각국의 정부들에 대한 국제 여론 내지 국제적 이미지(international image)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신정권의 도덕성은 당연히 국제적으로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 (2) 명동 3․1 사건

    ‘명동 3․1 사건’은 1970년대의 명동대성당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중에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유신통치가 시작된 후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며 박정희 정권에 막대한 타격을 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1974년 1월 8일에 선포된 긴급조치 1, 2호에 이어 1975년 5월 13일에는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9호까지 선포되어 무거운 침묵이 강요되던 중, 3․1운동의 57주기를 맞는 1976년 3월 1일에 3․1절 기념미사와 가톨릭과 개신교의 합동 기도회가 명동대성당에서 열렸다. 이 기도회에서 이우정 교수(개신교 교회여성연합회 회장)가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김관석, 윤반웅, 문동환,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이우정, 은명기 씨 등 12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던 것이다. 그 선언문의 3대 주제는 “(1)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였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며 긴급조치 9호가 강요했던 침묵을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 관련 피고인은 모두 18명으로, 그 중 11명이 구속, 7명은 불구속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크리스천이었고, 개신교목사가 여섯, 가톨릭 신부가 다섯으로 성직자만 11명이었다.
    이 기념미사가 평온한 가운데 끝난 후 그 다음날부터 관련자들이 연이어 연행되었고, 3월 10일에 서울 지방검찰청 서정각 검사장은, 종교 행사를 빙자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사건’이 발생하여 관련자 20여 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농성이나 시위없이 끝난 미사를 ‘정부전복 선동사건’이라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건으로 만든 것이다. 이 사건의 의의를 되새겨보자.
    첫째, 이 사건은 정부측과 교회 사이의 이념적 갈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남미의 군사정권 하에서도 보여졌듯이, 군부권위주의정권은 교회의 이러한 개입에 대해 “교회 성직자들이 정치에 간섭(meddling in politics) 하고 있으며,” “교회의 하층부에는 맑스주의자들이 침투(infiltration)해 있어 반란을 도모하는 반체제인사들의 도피처로 이용된다”고 여기는데, 이번 사례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반면, 기소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만1년에 걸친 재판과정 가운데 법정 증언을 통해 그들의 행동이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교회 본연의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음을 항변했다.
    둘째, 이 사건은 모든 정치적 저항을 완전히 묵살하려던 서슬퍼런 긴급조치 9호에 교회가 앞서서 정면으로 도전했던 점, 선언문 발표 후의 정부의 반향과 관련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나 부당하고 가혹하기에 교회 역시도 계속 강경하게 대응했다는 점에서, 학생시위가 인권운동에 다시 불을 붙이면서 부활하고, 체포된 양심수 및 정치범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양심수 석방운동이 다시 활성화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더 나아가 이 선언은 유신반대운동을 박정희 정권 퇴진운동으로까지 상승시켰던 것이다.
    셋째, 이 사건은 그즈음에 새로 발달하고 있던 재야운동에 구심점을 마련해 주었다. 이 사건에는 신․구교 종교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신망과 존경을 받던 해직교수들, 그리고 김대중, 윤보선 등의 정상급 정치지도자들도 포함되었고, 이들이 그 이후도 계속 유신정권에 대항하는 연합세력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넷째, 이 사건은 국내외에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의 신․구교 교회는 이 사건을 수많은 성명서, 질문서, 결의문, 공개서한, 진정서, 담화문 등을 발표하여 국내외에 알렸고, 세계교회협의회 등의 각국의 기독교 기관들을 통해서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다섯째, 이 사건은 그것이 3․1절을 계기로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또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즉, ‘제2의 3․1운동’을 지향하면서, 3․1운동이 식민지배의 종식을 요구했듯이, 이 선언은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선언이었다. 다만 이 선언이 반(反)유신운동을 3․1운동과 같이 거족적으로 즉각 유발하지는 못했을 뿐이다.
    끝으로, 민주구국선언은 새롭게 타오르고 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하고,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하며, 민족통일은 오늘 우리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라는 이 선언문의 3대 주제는, 앞으로도 여전히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3) 교회의 정치적 개입을 둘러싼 교회 내의 갈등

    이상의 사례들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 및 인권의 실현을 위해 개입했고 명동대성당이 중심이었던 많은 사례들 중 대표적인 두 가지 예에 불과하다. 반면, 그런 활발한 개입이 사회 및 국가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논란을 야기시켰음 역시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란은 주로 교회의 정치적 개입의 필요성과 한계점 및 어떤 것이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유신 시기 중에 교회의 정치적 개입은 특히 7월의 ‘지학순 주교 사건’과 12월의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결성이 있었던 1974년 말부터 주요 쟁점으로 크게 부각되어, 이듬해 초에 「가톨릭시보」(1975. 2. 16)에는 교회 내에서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두 신부들 간의 논쟁이 보도되었다.(교회 내의 진보적인 신학자이자 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인물이며 당시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대변인이었던) 함세웅 신부와 (사제단에 속하지 않는 보수적인 신학자이자 그 당시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학장이었던) 백민관 신부가 벌인 논쟁에서 이들의 두 가지 입장은 교회 내의 진보주의자(the Progressives) 대(對) 보수주의자(the Conservatives)라는 신학적․이데올로기적 차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통상 주교들 및 원로 사제들과 하위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서로 다른 지위 및 역할에도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교계(the Church Hierarchy) 내부의 불일치도「가톨릭신문」(1979. 10. 21)에 보도된 바 있다. 49명의 ‘교회현실을 우려하는 연장 사제들’이 쓴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이 그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백민관 신부를 포함한 이들을 대중매체에서는 ‘구국사제단’이라 불렀는데, 그들의 호소문 역시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을 불법시 내지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이 호소문은 유신체제가 막바지에 달하고 ‘오원춘 사건’에 직면하여 교회가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의 주도 하에 유신정권과 대항하고 있었을 때 발표되었다. 그러면 교회 내부의 이러한 갈등의 의의 내지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그 후 1980년대를 지내고 나서 돌이켜 보건대, 결과론적으로 이러한 교회 내의 갈등 내지 불일치, 또는 신중론, 그리고 사회 내의 보수층의 반대의견들까지도 교회가 정치적 개입 일변도로 치닫지는 않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길항작용(拮抗作用)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일치는 한국 가톨릭교회를 분열시켜 버린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unity amid diversity)를 결국은 터득하여 나름으로 성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의 한국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다양성이 어느 정도나 인정되었는가.
    둘째, 이러한 교회 내의 갈등 사례들이 예증하듯이, 유신 시기 동안 사회․정치적으로 개입했던 이들은 교회 구성원 중의 다수가 아닌 소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소수’(an active minority)와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를 대신하여 그리고 교회로서’(on behalf of and as the Church) 효과적인 행동을 했고 사회와 국가는 그들을 ‘교회로서’ 인식했다. 1990년대 말인 현재에도 교회 내에서 유신시대 명동대성당의 맥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 대표적인 단체로서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있는데, 교회와 국가, 그리고 사회가 동시에 보수화되고 있는 중에 이들은 여전히 교회 내에서 소수파에 불과하며, 그나마 이들 단체들만이 적극적으로 고군분투하면서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의 유신시기(1972-1979)에 명동대성당이 중심이 되어 교회와 국가간에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던 많은 사건들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및 인권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고 그런 역할은 1980년대말까지 이어졌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유신시기는 “기본적 인권이나 영혼의 구원이 그러한 판단을 요청하는 때면 언제나,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질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Gaudium et Spes;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no.76)의 실천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바로 그런 상황이었고, 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을 불사하면서 복음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입각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두드러졌던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는 한국의 민주화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고(1965년-1975년 57.2% 증가, 1975년-1985년 89.6% 증가, 1985년-1993년 60.8% 증가), 교회의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빚어졌던 교회 내의 분열도, 성숙된 교회의 ‘일치’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여야 함을 교회로 하여금 터득하게 했다.
1987년의 ‘6․29선언’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화가 진전되어 각계 각층이 점차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됨에 따라 교회의 정치적 개입의 입지 내지는 역할이 줄어들게 된 것은 당연하며 바람직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 상황과 인권상황이 아직도 본 궤도에 제대로 오른 게 아니라면, 도덕적 교사로서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교회는 본연의 역할을 벌써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구현하기 위한 인권운동은 이제는 생활 모든 분야에서 미진한 부분을 인권기준으로 개혁해 가는 시민적인 생활운동까지로 다변화되는 추세에 있고, 교회의 인권운동 내지 사회 참여 역시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더욱이, 현재의 IMF 경제위기는 곧 인권, 특히 경제적․사회적 인권의 위기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귀함, 도덕성과 인성(人性), 사회 정의와 공동선 등, 가톨릭교회로서도 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러한 것들이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이 시대에 예언자로서 그리고 도덕적 교사로서의 교회의 역할은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강조컨대, 인권의 추구(quest for human rights)와 정의의 요구(demand for justice)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도 여전히 중심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 한가운데에 다시금 명동대성당이 있다. 유신 때처럼 앞으로도 복음의 빛, 인권의 기준으로 이 세상 곳곳을 바꾸는 일, 주님의 뜻대로 한국 사회 안에 정의를 바로 세우고 모든 인간이 진정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명동대성당’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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