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현황과 주교좌로서의 명동대성당을 소개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역사

명동대성당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02. 개항기 주교좌 명동본당과 신자들의 역할




1. 머리말


1880년대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의 계획은 명동(종현)지역에 주교좌성당과 주교관, 신학교, 일반학교, 고아원, 인쇄소 등으로 이루어진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중심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정부가 미국, 영국 등 서양 여러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조약 상대국 사람들의 일정한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거주와 활동을 인정하고, 특히 조불조약(朝佛條約) 체결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국내 거주와 선교활동을 묵인하는데서 비롯된 계획이었다. 블랑 주교는 신자들의 종교생활에 대해서도 자유를 주게될 것이라는 판단아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지역인 종현 언덕을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열어나가는데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880년대 중반 이후 명동 주교좌본당은 한국 최초의 본당이었음은 물론 모든 본당의 모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조선정부의 박해를 피해 살고 있었던 신자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교우촌을 만들고 선교사들의 주거지를 확립하는 한편 장차 천주교회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면서 본당을 세워 나갔다. 이때 지방의 본당들 역시 서울 주교좌본당을 모형으로 사제관과 성당을 신축하고, 부속건물로써 고아원과 학교를 지어 학생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개항기 한국 천주교회 본당 발전에 모형이 되었던 명동 주교좌본당을 중심으로 리델과 블랑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었던 시기를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의 정착과정, 명동본당 설정 과정, 선교정책과 대사회 활동 등을 주교좌본당을 중심으로 통사적(通史的)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1876년 병인박해 이후 선교사들의 재입국을 시작으로 1890년 블랑 주교의 사망 때까지를 주로 다루게 될 것이다. 한편 명동본당은 주교좌본당이라는 특성 때문에 교구장주교의 본당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으며 본당 설정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이 교구장과 주임신부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연구에서는 부득이 교구장을 중심으로 당시의 교회정책과 활동을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 연구의 내용들은 본당신자들의 활동 기록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개항기 명동 주교좌본당 연구에 있어 기초적인 자료 검토와 분석이라는 초기 연구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 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야만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2. 선교사들의 입국과 서울 신자들


1866년 시작되어 대원군의 실각이 있었던 1873년까지 계속된 병인박해로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은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신자들 역시 순교하거나 산간벽지로 뿔뿔이 흩어져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동안 일구어 놓았던 교회의 조직은 지속적인 박해와 탄압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대부분의 주요 공소들과 교우촌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던 리델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은 재입국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1876년 5월 10일 블랑(Blanc) 신부는 드게뜨(Deguette) 신부와 함께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최지혁(요한)이 리델(Ridel) 주교를 위해 마련한 새문 밖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리델 주교의 입국을 위한 준비를 하는 한편 우선적으로 서울의 신자들을 찾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블랑 신부의 입국에 깊이 관여했던 신자들과 서울에 남아있던 일부의 신자들은 교회의 조직을 일으키기 위하여 가장 시급한 일은 공동체[공소]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이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전국적으로 흩어져 살고있는 신자들을 다시 모아 공소를 일으키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조선대목구 역사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교회 지도자인 공소회장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회 창립 이후 그동안 성직자의 부족과 부재(不在), 계속되는 탄압과 박해 속에서 성장한 교회는 공소와 이 공동체의 지도자인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난관들을 극복해 왔다. 따라서 신자들은 여러 지역의 교회 기초 조직을 이끄는 공소회장들을 뽑아 세우고, 이들을 중심으로 다시 신자들을 결집하여 공소들을 일으키는 작업이 병인박해 이후 1880년대 조선대목구를 일으켜 세우는데 있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판단하였다. 이들 신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인 블랑 신부와 드게뜨 신부는 우선 먼저 서울지역의 주요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기지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과 교우촌 그리고 옛 공소들을 방문하면서 신자들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공소를 일으키는 한편 새로운 공소회장들을 선임하였다.
1876년 10월 당시 블랑 신부가 파악한 서울의 신자들은 두 개의 공소들을 언제든지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블랑 신부는 성 안과 성 밖에 하나씩의 공소를 일으킬 수 있었으며 이들 신자들은 대략 300명 가량 되었으며, 남자들보다는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고, 남자신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지게꾼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처지는 물질적ㆍ영성적인 면에서 수 차례에 걸친 박해와 탄압과 그에 따른 약탈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들을 이끌고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신자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블랑 신부 역시 공소방문을 통하여 신자들의 실태를 파악해 본 결과, 자신을 영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신자들의 생각처럼 가장 시급한 문제로 신자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공소를 다시 일으키는 일이라 보았다. 그리고 공소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신자들을 공소에 불러모아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으며, 그들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헌신적인 공소회장을 새롭게 뽑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신자들의 기도생활을 위한 기도서와 예비자들에게 필요한 교리책을 간행할 수 있는 인쇄소의 건립과 어린이들의 기본적 교육을 위한 학교의 건립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우선 먼저 서울 성 안의 회장이 되기에 마땅한 인물을 찾고있던 블랑 신부는 마침내 문 안 공소의 새 회장으로 조참봉(Cho Tcham Pong, 베드로)을, 문 밖 공소에는 김 프란치스코를 임명하고 그들과 함께 리델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의 입국을 준비하는 한편 서울 인근의 신자들을 찾아 나서면서 옛 공소들을 복원하고 새로운 공소들을 일으키며 새 회장들을 임명하였다.
교회 재건에 힘을 기울였던 서울 신자들과 블랑 신부는 1877년 9월 23일, 조선대목구의 제6대 교구장 리델 주교와 두세(Dooucet), 로베르(Robert) 신부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리델 주교는 병인박해로 조선을 떠나지 11년, 조선대목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8년만의 입국이었다. 그는 도착 즉시 블랑 신부와 함께 기도서와 교리서 발간을 위한 인쇄소 건립을 추진하고, 블랑 신부가 교육시키고자 이미 선발한 2명의 학생을 시작으로 소신학교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교황칙서에 따라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선교사를 선발하여 동료 선교사 2명을 증인으로 세워 자신을 도와 선교활동을 할뿐만 아니라 후에 조선대목구 교구장직을 계승하게 될 보좌주교를 성품(聖品)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든 계획들은 만주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소식을 전하려던 신자 파발꾼이 체포되어 그의 편지가 발각됨으로써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28일 체포되어 6월 5일 감옥에서 풀려나 7월 12일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이 사건으로 조선정부는 주교 외에 4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리델 주교 체포는 곧바로 서울 신자들에 대한 수색과 체포로 이어져 32명의 신자들이 붙잡혀 이들 가운데 3명은 배교로 풀려나고 29명은 옥중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리델 주교의 체포와 함께 주교가 거처하던 집이 약탈당하여 블랑 신부는 미사주, 성무일도, 시계와 제병을 만드는 틀 등 선교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잃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델 주교 체포 후에 탄압과 피신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블랑 신부가 문 안 회장으로 임명한 조 베드로와 김옥재(요한) 등은 서울에 계속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신자들은 전라지역에 있는 블랑 신부에게 서울의 리델 주교의 감옥생활과 정치적 상황 변화 그리고 신자들의 상황과 처지 등 여러 정보들을 서신으로 전하였다. 그리고 리델 주교가 중국으로 추방된 이후에는 블랑 신부가 빨리 서울로 올라와서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자신들의 중심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블랑 신부와 리델 주교가 입국하였던 1870년 대 후반의 교회는 1866년 이후 10년간 지속되었던 병인박해로 그 동안 가꾸어 왔던 조선대목구의 공동체들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신자들은 중국으로 피신한 선교사들과 연락하여 다시금 그들을 영입하려는 운동을 펼쳐나갔고, 피신하거나 새로이 조선대목구로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만주에서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국내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추진과 국외에서 펼친 선교사들의 입국 시도의 결과로 마침내 1876년 5월 10일 블랑과 드게뜨 신부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이들은 입국하자마자 자신들의 입국에 참여한 신자들과 더불어 신자들의 소재 파악에 나서는 한편 완전히 파괴된 교회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장 중요한 교회 재건 정책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한국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도인 공소회장 제도였다.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창립은 공소회장 제도의 도입과 활용으로 100년간의 박해시대를 거쳐오면서 기존 신자들의 신앙을 유지시키고 견고하게 했으며 단일성을 보존했음은 물론 이웃에게 신앙을 전함으로써 교회 발전을 이루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블랑 신부의 영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신자들은 신부의 입국과 더불어 공소회장을 임명하면서 옛 공소들의 복원과 새로운 공소들을 세워나가는 길이 교회 조직 재건에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건의하였다. 이들의 건의에 따라 블랑과 드게뜨 신부는 공소회장의 임명과 공소를 세우는 일을 교회 재건의 제일 과제로 선택하면서 이를 시행해 나갔다.
병인박해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의 이러한 교회 재건과 확장을 위해 선택한 공소재건 정책은 개항기 이후 조선대목구의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기존 신자들을 위한 기도서와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서의 필요성은 인쇄소 건립 추진으로 이어졌고, 신자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노력은 학교 건립 추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블랑 신부와 드게뜨 신부는 조선대목구에 진출한 파리외방선교회의 설립 목적 가운데 하나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각 지역의 신자들 방문을 통하여 신학생을 선발하고 리델 주교가 입국하였을 때는 이미 신학교를 운영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877년 9월 23일 리델 주교와 두세, 로베르 신부 등의 입국으로 당시 조선대목구에는 5명의 성직자들이 활동하면서 병인박해 이후의 교회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 성직자들의 입국과 활동에 가장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신자들이 바로 서울의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서울의 신자들과 문 밖ㆍ문 안 2개 공소 존재의 의미는 1870년대 후반 입국하는 성직자들에게 조선대목구의 희망이었으며, 전국의 신자들과 공소들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희망과 그들을 연결짓는 고리의 중심에 종현(명동)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3. 명동 주교좌본당


조선대목구에서 활동하는 동료 선교사들과 한 자리에 모여 보좌주교를 성품하고자 하였던 계획이 자신의 체포와 추방으로 무산되자 리델 주교는 서신을 통하여 1878년 9월경 블랑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블랑 부주교는 교구장이 공석 중인 조선대목구에서 실질적으로 선교정책을 세우고 동료 선교사들을 이끌어 나가야하는 책임을 져야만 하였다. 이때 그가 선택한 선교정책은 서울 신자들과 공동체를 우선적으로 재건ㆍ확산시킨다는 그 동안 교구장들이 일반적으로 견지해왔던 입장에서 지방의 주요한 공동체들을 먼저 성장시킨다는 방법을 취한 듯 하다. 따라서 서울의 주요한 신자들의 거듭되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처를 전라지역에 정하고, 그들과는 서신으로 계속 정국을 주시하면서, 동료 선교사들과 더불어 각각 맡고 있는 지역에서 신자들을 방문하거나 찾아내면서 교회 재건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리델 주교의 체포로 서울에서의 활동이 더욱 위험해졌으므로 선교활동의 제약이 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우선 각 지방의 옛 신자들을 찾아 지방의 신자조직들을 일으켜 세우고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 더욱 유리한 선교정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델 주교의 체포와 중국으로의 추방이 있었으나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크게 일어나지 않게 되자 블랑 부주교의 이러한 정책은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블랑 부주교를 비롯한 드게뜨․로베르․두세 신부들은 각자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에서 옛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옛 공소회장이 살아 있는 경우 그를 다시 회장으로 재임명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회장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각 지역의 지도급 신자들을 중심으로 공소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박해를 피해 살고 있는 전국 신자들의 상황과 실태를 파악하고, 지방의 공소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하루빨리 박해 이전의 신자공동체를 복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하게 지방에서 공소를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1879년 5월 14일 드게뜨 신부가 공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드게뜨 신부 역시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리델 주교의 경우와 같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위축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체포 즉시 죽임을 당하였던 과거와는 달리 체포는 곧 중국으로의 추방이라는 정부의 선교사에 대한 태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체포에 따른 교회의 혼란과 선교활동의 지장을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신자방문에 더욱 주의하면서 박해 이전의 지방 교회의 조직을 재건하고 강화시켜 나갔다. 드게뜨 신부의 체포ㆍ추방 사건은 블랑 부주교로 하여금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전라지역에서의 활동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고 부득이 1879년의 서울 신자 방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울 신자들은 블랑 부주교가 전라지역으로 떠난 후 일어난 리델 주교의 체포로 또다시 성직자 없는 가운데 서울의 두 공소를 자신들의 힘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리델 주교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 경과한 1880년 봄과 여름 사이 로베르 신부가 신자들을 방문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성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1878년 1월부터 1880년 봄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 서울 신자들은 사대문(四大門) 안팎의 두 공소를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유지하면서 선교사들 사이의 연락과 국경의 변문을 통한 중국의 리델 주교와의 교류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정부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펼친 개국정책(開國政策)과 개화사상의 확산은 사회의 변화를 예고하였고, 구미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소식은 블랑 부주교로 하여금 서울에 확고한 거처를 정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1880년 11월 10일 뮈뗄(Mutel)과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입국함에 따라 선교사들이 각각의 지역을 분담할 수 있게 되자 블랑 부주교는 그 동안 자신이 담당하던 전라지역을 다른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또한 1876년 블랑 부주교가 서울에 처음 정착하였던 이후 서울 신자들은 꾸준히 증가하여 1882년 5월경 성사를 받은 신자 수가 600여 명을 헤아리게될 만큼 성장하였으므로 서울의 공동체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와 같이 블랑 부주교의 서울 정착은 리델 주교 체포 이후 정부의 탄압을 피하는 동시에 각각의 지방 공동체를 키워 조선대목구 교회의 전체 조직을 강화하겠다는 그의 선교정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마침내 블랑 부주교는 1877년 9월 23일 리델 주교의 재입국으로 선교활동을 지방으로 옮긴 지 5년만에 다시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블랑 부주교는 자신이 담당하던 전라지역을 리우빌 신부에게 위임하고 1882년 부활시기 성 마르코 축일 전날인 4월 2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리우빌 신부와 함께 입국한 뮈뗄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블랑 부주교의 명령에 따라 황해도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블랑 부주교가 올라오기 1년 전인 1881년 3월 25일부터 수시로 거처를 옮긴 끝에 농포안에 거처를 정하고 서울 근교뿐만 아니라 경기ㆍ황해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신자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온 블랑 부주교 역시 혹시 일어날 지도 모르는 리델 주교의 체포와 같은 사건을 피하기 위하여 뮈뗄 신부와 서로 다른 곳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그곳이 필동이었다.
블랑 부주교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로베르ㆍ뮈뗄 신부와 함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諡福)ㆍ시성(諡聖) 청원에 관한 문제와 가톨릭계의 학교를 세울 필요성 등에 관해 서로 상의하는 한편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블랑 부주교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1884년 4월 이후 이러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이미 학교 건립을 위해 구입한 가옥을 중심으로 종현(명동) 인근의 가옥과 대지매입을 서울 신자들 명의로 추진한 듯하다.
1878년 1월 28일의 리델 주교의 체포와 추방 사건은 조선대목구의 선교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대목구 역대 교구장들은 서울의 공동체와 신자들을 조선대목구의 중심에 두고, 자신들의 거처 역시 수도에 두면서 전국적으로 펼치던 선교활동을 일관되게 견지해왔었다. 조선의 중심인 서울에 선교본부와 교구장의 거처를 마련함으로써 확고한 조선대목구 선교의 거점을 수도에 마련하고 우선 먼저 이곳의 공동체를 공고이하여 지방으로 확대시켜왔다. 따라서 조선대목구의 주요 신자들은 서울에 많이 있었고, 이들의 전국적인 연락망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국과 박해 상황 등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서울 신자들은 각 지역의 공동체들을 연결시켜 주었고 선교사와 선교사 사이의 연락도 이들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병인박해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만주의 선교사들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정국 변화와 신자들의 상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1876년 5월 10일 블랑과 드게뜨 신부 입국으로 재개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과 정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들 역시 서울의 신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든지 성직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블랑 신부의 입국과 서울 정착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안과 밖에 훌륭한 두 개의 공소를 이룩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의 체포는 그 동안 역대 교구장들이 수행하였던 선교활동 계획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리델 주교의 부재 이후 조선대목구의 책임을 담당하고 있던 블랑 부주교는,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서울의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선교사와 선교본부를 서울에 두지 않는 대신 우선 먼저 병인박해 이후에 완전히 무너져 있는 각 지방의 옛 공소들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공소들을 일으키는 일종의 지방 공소 부흥정책을 펼쳐나갔다. 지방의 공소들을 확대하면서 리델 체포에 따른 정국이 안정된 후 서울에 정착한다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오히려 서울과 지방의 공동체들을 동시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리델 주교 체포 이후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서울의 주요 신자들이 다행이 박해를 피하여 계속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블랑 부주교가 1882년 4월 22일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전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주요 신자들과 전국 각지에 흩어진 동료선교사들과의 서신 교류가 가능하였고 만주의 리델 주교와의 연락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개항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과 정착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듯이 블랑 부주교의 지방 공소 부흥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신자들이 바로 후일 명동 주교좌본당을 이룬 서울의 신자들이었다.
뮈뗄 신부와 블랑 부주교의 서울 정착 과정을 주시하면서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뮈뗄 신부는 블랑 부주교의 인사 명령에 따라 황해지역을 떠나 1881년 3월 25일 서울에 정주(定住)하면서 일정한 지역을 담당하며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블랑 부주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의 사목 전담구역이었던 전라지역을 떠나 뮈뗄 신부가 정착한지 약 1년 후인 1882년 4월 22일에 서울에 정착하였다. 뮈뗄 신부와 블랑 부주교의 서울 정착에 관한 문제는 ‘명동본당’과 ‘명동 주교좌본당’의 설정 시기와 초대 본당신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뮈뗄 문서에 남아있는 1882년 성모무염시태 지역의 교세통계표를 기준으로 명동본당이 설정된 연도를 1882년으로 하였고, 교세통계표를 작성한 블랑 부주교를 초대 본당신부로 보았다. 따라서 일정한 사목구역이 있었고, 이 지역의 사목을 구체적으로 담당한 성직자가 있었으며, 비교적 정확한 교세통계표를 작성하기 시작하여 그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을 본당 설정에 대한 중요한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한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통계표를 중심으로 명동본당 설정을 찾다 보니 본당 설정의 정확한 날짜를 제시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비록 서울지역에 대한 명확한 교세통계표가 작성되지는 않았으나 뮈뗄 신부의 서울 정착이 명동본당의 설정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는 첫째, 뮈뗄 신부의 황해지역으로부터 서울로의 인사이동이 블랑 부주교의 명령에 의해서 일정한 사목 관할구역과 정주하여야 하는 장소가 확정된 가운데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당시 리델 교구장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인사이동이었으나 실제적으로 부주교인 블랑은 조선대목구의 교구장 리델 주교를 대리하였으므로 그의 인사를 교구장의 명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뮈뗄 신부의 인사이동과 서울 거주 명령을 본당 설정의 기준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뮈뗄 신부의 서울 정착과 활동은 구체적인 사목 관할구역인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1881년의 그의 사목 활동지역은 1882년에 블랑 부주교가 작성한 교세통계표의 성모무염시태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셋째, 뮈뗄 주교가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의 분할에 따라 작성한 조선대목구의 「사목 구역의 설립과 선교사들의 거주지」라는 문서에 보면 자신이 거주한 1881년 5월의 ‘인성부대’를 ‘경리부(Seoul procure)'가 있었던 곳으로 표시하였고, 1882년 블랑 부주교가 거처한 ‘필동’을 ‘주교관’(Seoul Ev˄eché)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표기 가운데 1882년의 블랑 부주교의 서울 정착만을 기준으로 명동본당 설정을 가늠해 보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뮈뗄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블랑 부주교의 정착은 ‘주교의 서울 정착’에 따른 ‘주교관’의 설립으로 간주하고 때문이다.
또한 정확히 뮈뗄 신부가 경리부에서 일하는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1883년 6월 3일 블랑 부주교가 주교로 성품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면서 임명이 이루어졌기에 그가 작성한 대로 1881년부터 뮈뗄 신부가 경리부를 담당하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1883년 6월 이전까지 다른 선교사들처럼 선교활동에 주력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특수한 임무인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ㆍ시성 추진을 위한 청원 조사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 좀더 명확하게 당시 본당 설정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연구한 후에 명동본당 설정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명동본당’과 ‘명동 주교좌본당’으로 나누어 본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명동본당’에 중심을 둔다면, 1881년 블랑 부주교의 명령에 따른 뮈뗄 신부의 파견은 일정한 거처에 정주하며 정해진 사목구역에서 활동하였으므로, 비록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을 준비하도록 한 인사이동이었다 할지라도, 이 자체로 ‘명동본당’이 설정된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명동본당 설정 날짜는 1881년 3월 25일이고, 뮈뗄 신부가 명동본당의 초대 신부가 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반면에 ‘명동 주교좌본당’에 초점을 맞춘다면, 1882년의 블랑 부주교의 서울 정착을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 날짜는 1882년 4월 22일이고, 블랑 부주교가 ‘주교좌본당’의 초대 신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뮈뗄 신부의 1881년 서울에서의 활동은 일종의 명동 주교좌본당 전사(前史)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4. 결론


개항기 설정된 명동 주교좌본당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순히 이름만 주교좌본당이 아니었다. 병인박해 이후 전국적으로 설립되는 모든 지역 본당의 모(母) 본당으로써 하나의 모델이었고, 모든 본당들의 중심이요 안내자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이와 같은 지금까지 병인박해 이후 선교사들의 입국과 교회재건 과정에서 드러난 서울 신자들의 주요한 역할들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블랑 부주교의 서울 정착과 관련한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 과정에 주목하였다. 명동 주교좌본당과 서울 신자들에 관해 살펴보면서 제기된 몇 가지 문제들을 간략히 언급하고, 주로 개항기 명동 주교좌본당신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병인박해 이후 선교사들이 입국을 시작한 1876년 이후 천주교회는 박해 이전보다도 더 참혹한 상태에 있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던 공소들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고, 교회의 주요 신자들은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산 속에서 살거나 남의 집에 얹혀 사는 등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신자들은 서울 중심과 인근에 살면서, 조선 정국의 변화와 박해의 상황 등을 만주에서 재입국을 시도하는 조선대목구 제6대 교구장 리델 주교와 선교사들에게 전하면서 또 다시 성직자 영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영입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이 바로 서울 신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은 1876년 5월 10일 블랑과 드게뜨 신부를 안전하게 입국시킴으로써 10년 동안 끊어져 있던 교회의 역사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진 교회의 조직을 재건하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직자 영입에 가담한 신자들은 교회의 창립 때부터 이어져 내려와 전통으로까지 확립되어 있었던 공소회장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하여 공소들을 재건하는 길이 교회 재건의 급선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입국한 선교사들에게 건의하는 한편 자신들 스스로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옛 공소들과 신자들을 파악하는 한편 그들을 서로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주요 신자들의 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언제라도 성직자들이 입국하면 재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듯 하다. 이는 블랑 신부의 입국에 깊이 관여한 신자들과 그가 입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바로 재건된 서울의 두 공소의 존재로써 확인된다. 그리고 신자들은 교회 재건의 방법과 길을 서울의 두 공소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문 안 공소의 존재는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교회의 창립지(創立地) 명례방 주변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1881년 황해지역에서 올라온 뮈뗄 신부가 1882년 4월 블랑 주교를 위해 마련하였던 필동의 주교관과 더불어 학교 개설을 위해 구입한 큰 가옥이 있었는데 이 학교를 위해 매입한 집이 명례방 근처에 있었고, 이 학교가 기초가 되어 오늘날의 명동 주교좌본당 구역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집은 1884년 9월 한한학교(école sino-coréen; 漢韓學校)라는 이름과 함께 3개 학급으로 교육을 시작하였고, 학교 개원을 하자마자 블랑 주교는 점차 학교 주변의 대지와 가옥들을 구입하여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오늘날의 명동 주교좌성당 건립을 목표로 먼저 학교를 세울 집을 매입하고, 이 학교 인근 지역의 가옥과 대지를 구입하면서 기반을 잡아 나가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인근의 토지와 가옥들을 매입한 후 인쇄소와 주교관을 세우고, 1885년 3월 15일 곤당골에 설립하였던 고아원을 이곳으로 모아 오늘날의 명동 주교좌성당 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블랑 주교가 하나의 커다란 구역 내에 주교관, 신학교, 인쇄소, 학교, 고아원, 주교좌성당 등을 건립하여 명실공히 교회의 중심지로 발전시켜나갈 것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병인박해 중에도 신자들은 교회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명례방 지역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도 이 지역을 교회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들의 입국이 이루어지자마자 이미 자신들이 구상하였던 바를 이행해 나갔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블랑 주교는 위와 같은 계획안에서 명동 주교좌본당 창설 전에 이미 명동본당 창설을 염두에 두고 뮈뗄 신부를 서울로 이동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1881년 3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한 뮈뗄 신부가 맡고 있던 지역은 블랑 주교가 1882년 4월 22일 도착하여 관할하던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블랑 주교가 작성한 1882년부터 1883년까지의 교세통계표에 나오는 성모무염시태(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 지역이 바로 그 지역이다. 따라서 블랑 주교는 이미 명동본당 창설을 염두에 두고 뮈뗄 신부를 파견하여 주교좌본당을 창설하기에 앞서 필요한 제반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뮈뗄 신부의 활동은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의 전사(前史)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뮈뗄 신부가 정착한 이듬해인 1882년 4월 22일 블랑 주교가 서울에 정주하면서 성모무염시태 지역을 사목한 것으로 보아 이 날짜를 명동 주교좌본당 설정일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성모무염시태 지역이 주교좌본당 관할 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1898년 5월 29일 축성을 한 명동 주교좌성당이 블랑 주교가 관장하였던 성모무염시태 지역과 일치하는 이름으로 주보성인을 ‘원죄없이 잉태하신 마리아’를 모심으로써 주교좌 본당의 역사성을 길이 간직하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명동 주교좌본당의 신자들은 병인박해 이후에 국내에서 성직자 영입에 깊이 관여하고, 성직자들이 입국하였을 때에는 교회 재건에 중심적 인물로써 지방 공소와 신자들을 찾아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878년 리델 주교의 체포ㆍ추방 이후 블랑 주교가 선택하였던 지방 공소 부흥 정책이 실행될 때 선교사와 선교사들 사이의 연락과 중국과의 연락 그리고 공소와 공소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따라서 개항기 명동 주교좌본당 신자들은 본당이 조선대목구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면, 그들은 전국의 교회 조직을 잇는 동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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