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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Ц

생명

말씀

모호해서진실인

5월,성모성월끝자락에만난성모님의모습이인상적입니다.자그마한키가안쓰러워고개를기울여주시는

걸까요? 삼위일체의신비는곧사랑의신비입니다. 사랑은모든것을용서하며희망과용기를줍니다. 세상

끝날까지함께하시겠노라던주님의크나큰사랑을마음속에새기며, 도움의손길을필요로하는이웃을사

랑으로보듬어힘이되어주는,그런사람으로거듭나기를오늘도기도합니다.

이복희

릿다

|

가톨릭사진가회

“보라,내가세상끝날까지언제나너희와함께있겠다.”

(마태28,20)

사진

설명

의정부교구수동성당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한 아이가 나타나, 삼위일체의 신비를 머리로 이

해하려는 것은 마치 모든 바닷물을 해변의 모래 웅덩이에

담으려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처럼삼위일체의신비를논리적으로개념화하

려는 것은 불가능한, 혹은 무의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호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결

국우리, 인류의체험때문이라고할수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신적 체험을 이어가던 고대인들이 그 파

편적인 경험들을 나름대로 맞추어 가다가 무수한 신들이

등장하는 신화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들의

세계를 뚫고 나온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통해, 우리

는그것이 ‘여러신’에대한경험이아니라하나의신으로부

터 나오는 체험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이

라 느껴졌었지만,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모호한 경

험을최대한이론적으로정리한것이삼위일체신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하느님

을정의내리고자하는것이아니라, 우리의경험이엉뚱한

방향으로흘러갈것을경계하는것이라할수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비는 역설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

기보다 우리가 가진 한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

하는 ‘한계’란, 가능과 불가능 사이의 경계가 아닌, 처음부

터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우리가 생긴 모습이나 조건입니

다. “내가 저 산 위의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보이는데,

그 가지에 앉은 새가 어떤 새인지는 안 보여” 하는 식이 아

니라 “우리는 앞과 뒤와 위에서 동시에 사물을 바라볼 수

없어.” 혹은 “우리는 어제의 남산과 지금의 남산과 내일의

남산을동시에오를수없어.” 하는식이지요.

그 한계를 자각하며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

는, 하느님을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신앙이라 호도하

지않고, 나를바라보는하느님과하느님을바라보는나사

이에참신앙이이루어진다는것을깨닫습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청소년들도 그런 맥락 속

에서 함께 합니다. 때로는 어른이, 때로는 어린이가, 때로

는질풍노도의역동이드러나는모호함을머릿속에서정의

내리고규정하려하면할수록

(긍정적이든부정적이든)

진실은멀

어져가고 실체는 길을 잃습니다. 진심으로 바라보고 만나

고더불어함께걸어갈때모든불확실함들이제위치를찾

고, 가능성만있던것들이실현되기시작합니다.

파고들면파고들수록, 모호해서진실입니다.

이승주

대건안드레아신부 | 청소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