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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대건·최양업 신부님탄생

희년

(禧年)

이 끝나고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며 희년을 잘 살았

는지 반성해봅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는 주제로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과 최양업 신부님을 기억하

는 올 한해에 그분들이 살아생전 보여주었던 신앙의 증거

와 성무 활동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어려운 마카오 유학 생

활 중에 김대건 소년이 성장통을 극복해가며 청년 신학생

이 되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고 신덕

(信德)

과 용덕

(勇德)

키워나갔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만이 가진 과감성, 그것이

때로는 스승 신부님들에게는 위험한 모험으로 보였을지라

도, 나룻배를 몰고 서해를 건너며 바닷길을 개척했던 조선

의 첫 사제! 옥중 생활에서, 새남터 형장에서 보여주었던

신앙의 용사로서의 모습!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하

고 믿음을 증거하고, “영원한 생명이 내게 이제 막 시작되

려고 합니다.”라고 형벌의 칼 앞에서 공표했던 김대건 신

부님을만났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지내면서 우리는 “당신이 천주교인이

오?”라는 질문에 어떻게 응답했는지요? 혹시 코로나19를

핑계로 “저는 잠시 쉬는 중입니다.” “저는 냉담 중입니다.”

“온라인이훨씬편합니다.”라고하지는않았겠지요?

동갑내기 최양업은 첫 번째로 부르심 받은 신학생으로

학생 시절과 사제생활 내내 스승과 동료 사제로부터 사랑

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규칙적이고 바른 신학생, 성적이

우수하고 모범적인 신학생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베르뇌

주교님으로부터는 “12년 동안 끊임없이 그는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철저하게 지키며 모범을 보였고, 구령사업

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1861년 9월 4일 베르뇌 주교의 서한)

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최양업 신부 같

은 이가 10명만 되면 조선 팔도가 다 복음화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그분

의 겸손함에서 드러나는 성실한 성무 활동으로 산골 교우

촌을 방문하며, ‘찾아다니는 사목’을 하였습니다. 한여름

휴식 시간에는 다블뤼 주교님의 작업을 도와 교리서와 기

도서의 한글 번역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몸

을 돌볼 겨를도 없이 교우들의 삶과 영혼을 돌보시다가 길

위에서선종하신사제입니다.

그렇게 한국 교회에는 김대건 성인과 가경자 최양업 신

부님 두 기둥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가 희년을 지내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복된 한 해의 기쁨과

구원을 한 해에 그칠 것이 아니라 삶으로 계속 이어나가

야 한다는 뜻에 있습니다. 희년은 복된 해, 기쁨의 해, 대

(大赦)

의 해, 곧 용서와 구원의 해입니다. 희년은 끝났지

만 두 분이 남기신 피의 순교와 땀의 순교의 자취는 피땀

어린 정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말씀

(言)

이 사람이 되

(成)

정성된

(誠)

역사를 되돌아보며 희년

(禧年)

을 다시 살아

갑시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

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1846년 6월 8일 김대건의 옥중

편지)

조한건

프란치스코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복된해를이어가며

니다. 희년을 지내는 동안, 하느님을 사랑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같은 해에 태어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모범을 본받아 두 분의 영성을 우리 삶에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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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대건·최양업 신부님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