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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가톨릭
성인의
삶
글_
서희정
마리아
|
그림_
홍미현
세레나
형제를위하여
성라이문도
논나투스증거자
(축일: 8월31일)
‘노예’라고 아시나요? 사람이 사람에게 소유물이 되어
자신의 소유물은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존재 말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코
가 있어도 숨 쉬지 못하고, 손발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
는 것이 노예입니다. 주인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그 어
떤 자유도 그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살아 있으
나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죠. 그러니 그 누가 노예가
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희한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있는 이 남자, 며칠 전부터 노예를 대신하여 이곳 감
옥에 갇혔습니다. 이름은 라이문도 논나투스. 스페인 신
부입니다. 이 신부가 이곳, 북아프리카 알제리아까지 와
서 갇히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라이문도 신부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스페인을 정복
한 사라센인이 스페인 사람을 북아프리카 곳곳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라이문도 신부는 바로 이 형제를 구하고자
했고,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 온 것이죠. 실제로 라이문도
신부는 스페인에서 준비해 온 몸값으로 여러 형제를 노예
라는 족쇄로부터 구출시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예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준비한 돈은 다 떨어졌
지, 눈물에 잠긴 형제는 눈에 밟히지, 그래서 라이문도 신
부는 스페인에서 추가 배상금이 도착할 때까지 형제를 대
신해서 이렇게 인질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보면 알겠지만, 이 신부의 온몸은 매를 맞아 피와 진물
로 얼룩덜룩해 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인 고통도 심하게 당했습니다. 욕설은 물론이고 온갖 모
욕도 받아내야 했죠. 입에 저건 뭐냐고요? 자물쇠요. 네,
맞습니다. 무언가를 잠글 때 쓰는 그 자물쇠입니다. 라이
문도 신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에 뜨거운 못으로 구멍을
뚫어서 자물쇠로 잠가놓은 겁니다. 왜냐고요? 하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이 많다고 저렇게 해 놓았습니다. 라
이문도 신부가 형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걸 보고 많
은 사라센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됐거든요. 마음 같
아서는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죽여 버리고 싶었지
만 라이문도 신부가 죽어버리면 배상금을 받지 못하니 목
숨만은 살려 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중요했으니까
요. 이쯤 되면 라이문도 신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만도
한데 자유를 얻은 형제를 생각하며 기도에만 집중하고 있
습니다. 형제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것
임을 잊지 않은 것이죠. 입이 잠겼다고 마음마저 잠기지
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라이문도 신부 대신 풀려 난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들도 라이문도 신부를 기억하고 있
을까요?
* 덧: 다행히 성 라이문도 논나투스는 배상금이 도착
하여 풀려났다. 하지만 그동안 당한 고문의 영향으로 열
병에 걸려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